떠나기 전의 설렘
…with 온 세상은 내 세상인 세돌 갓 지난 큰 아가,
뒤집고 또 뒤집고 뒤집으면 또 뒤집는.. 7개월 된 더 아가.
하루 종일 바람은 따뜻하고,
하루 종일 하늘은 낭만적이고,
매일 아침 눈 뜨면 바다가 보이는 베란다에 앉아 커피 한 잔.
그런 한 달을 당연히 기대하진 않지만.
그래도 아가들에겐,
너희에겐
온몸으로 자연을 체감할 수 있는
바다의 깊음과 넓음을
글과 그림이 아닌
눈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짧지만, 짧지만은 않은
그런 한 달이 되길 바란다.
엄마의 한 달 테마는
“건강”
매일매일 큰 아가 손잡고,
작은 아가 아기띠에 안은 채
한 시간 산책길 걷기.
너희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엄마의 건강에 대한 열망도 커진단다.
더 오래오래 건강히 함께 놀고 싶어서.
더 열정적으로 놀고 싶어서.
숫자보다 한글보다 알파벳 보다
자연을 먼저 느끼게 해 주고 싶은 마음에
산 자락 밑 아파트를 못 떠나고 있지만,
(근데 겨울은 너무 춥다.)
그 보다 더 온전히 자연을 느끼고
온전히 더 놀아보자.
떨리고 설렌다. 앞으로의 한 달..
- 제주도 한 달 살이 시작 5일 전 -
아직까지도 눈만 감으면 행복함이 쏟아지는 듯한, 우리 아이들이 온종일 무언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던 120일간의 제주도 살이.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간 곳은 바다도 아니오, 산도 아니오, 제주도를 갈 때마다 늘 한번 더 먹고 올 걸 하고 아쉬워하던 밀면집이었다. 둘째 임신했을 때도 이 집 밀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언니가 포장해 올 방법을 연구하다 결국 포기하고 사진 보며 입맛만 다시던 바로 그 밀면이다.
“빨리 가자. 늦게 가면 수육 없잖아!”
모슬포 골목길, 산방 식당. 골목길에 들어서면 이미 길게 늘어선 줄 때문에 찾기도 쉽다. 자리도 좁아 아이들 데려가기 편하지만은 않은 곳인데 갈 때마다 사장님의 친절한 배려 덕분에 큰 아이도 매운 양념장 빼고 참기름에 비벼 잘 먹는 메뉴 중 하나이다. 비빔과 물 중에 당연히 물. 가끔 비빔을 시키면 다 먹을 때쯤 ‘아, 여긴 무조건 물인데.’ 하고 아쉬움이 남는다. 무조건 물. 사람 따라 입맛이 달라서 메뉴 추천은 안 하지만, 이곳은 무조건 물. 수육을 시키면 국수에 들어간 고기와는 달리 보들보들하고 따뜻한 고기가 듬성듬성 썰려 대충 접시에 담겨 나온다. 그 고기에 국수를 돌돌 말아먹으면.. 수육이 다 떨어져 밀면만 먹은 날은 또 약간의 아쉬움이 남아 다음날 늦지 않게 꼭 한 번 더 오게 된다. 이 밀면 생각할 때가 제주도 가고 싶은 마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다. 추운 겨울날 조차 시원한 그 국물을 쭈~욱 들이켜게 되는 신기한 중독성. 먹을 것에 호불호 없이 가리지 않고 다 잘 먹는 신랑도 제주도에서 먹은 음식 중 제일로 손꼽는 것이 바로 이 집의 밀면. 보통 사이즈도 혼자 다 먹기 많은 양인데, 늘 곱빼기를 시켜도 남김없이 싹싹 비우곤 했다.
그 밀면을 거하게 먹고 나니, 이제야 실감이 난다. 제주도 한 달 살이.
바닷길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제 매일 저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당장 내일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모른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커피 한잔 내려 텀블러에 담았다. 아직 잠자고 있는 작은 아가와 이모 베개 위에 “우리는 마실 가요.”라는 메모를 남겨두고 첫 동네 산책에 나섰다. 참 조용한 아침. 들리는 소리라곤 우르르 몰려다니며 지저대는 새소리들뿐. 제주도에 수 없이 왔으면서도 이렇게 느긋하게 아침을 산책했던 적이 있었나? 자연을 위해 찾는 제주였는데도, 이렇게 온전히 자연 소리에만 귀 기울였던 적이 있었던가?
큰 아가는 아직 쌀쌀한 날씨 때문에 새들이 걱정되었는지, 새들에게 옷을 입혀줘야 할 것 같다며 새에게 옷 입힐 방법을 생각해 보느라 끊임없이 재잘재잘. 갖가지 꽃봉오리 보며 엄마 이건 무슨 꽃으로 필 것 같아?라고 서로 맞추기 놀이하며, 매일 아침 산책할 때마다 과연 어떤 꽃이 나올지 지켜보자고 약속도 했다. 육지에서도 큰 아가가 일찍 깨면 아파트 뒷 산길을 손잡고 산책하는 일이 잦았는데, 새로운 곳에 오니 아가도 더 설레었는지 궁금한 것도 더 많았다.
큰 아이는 겁도 많고, 걱정도 많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조심성 많은 아이였다. 해변가에 가도 손과 발이 지저분해지는 것이 싫다며 바다를 눈으로만 보던 아이였다. 동네 모래 깔린 놀이터는 근처만 서성거릴 뿐 들어가지 않던 신중한 아이였다. 미끄럼 타는 일 조차 큰 아이에겐 굉장한 모험이고 도전이었다. 그런 아이에게 가족들 중 그 누구도 억지로 강요하거나 이게 별거냐며 채근하거나 보채지 않았다. 기다리다 보면 편해지는 날이 오겠지, 겁이 많은 대신 오감이 발달하고 머릿속에 이야기가 많은 아이니까 기다려주면 되겠지 라고 서로 믿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첫날 산책길에 들른 동네 놀이터에서 큰 아기가 미니 암벽을 키득키득 웃으며 올라갔다.
“엄마, 제주도에 오면 용기가 생겨.
요정이 내 마음속에 사랑이랑 용기를 같이 주고 갔어.”
아이에게 제주도는 그런 곳이었다. 새로운 걸 도전하게 하는 곳. 어른들도 여행지에 가면 안 하던 행동들을 한 번 도전해보고,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엉뚱한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새로운 나를 스스로 발견하는 것 또한 여행의 아주 큰 의미 중 하나인데, 큰 아가도 자기 방식대로 여행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었다.
힘들고, 귀찮고, 지치던 순간들을 조금씩 참아내고 아기띠로 안아 수 없이 다니던 동네 산길들, 제주 바닷길들, 유럽의 하이킹 자락들.. 그 순간순간 아가의 몸과 마음에 다 채워 주고 싶었던 자연의 모습들, 아가 두 눈에 다 담아 마음으로 작은 요동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던 그 자연의 모습들. 하나하나 다 쌓여 이렇게 자연에서 힘을 얻고, 여행의 묘미를 나름 알아가는 건가.
아이의 별 거 아닌 말에 너무 큰 의미를 두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이의 변화는 부모의 아주 세심한 관찰에서만 발견되는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차린 부모의 공감이 아이를 더 의미 있게 만들 것이라는 것이 내 믿음이다.
그 이후로, 큰 아가와 아침 산책을 할 때마다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조금씩 더 먼 곳으로 가 보았다. 그 동네 놀이터는 구석구석 다 찾아 데리고 다니며 한두 시간 아침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침밥 한 그릇 뚝딱은 말할 것도 없었고, 한 주 한 주 지날수록 큰 아가는 더 많이 걸어도 안아달라는 말을 하지 않고 씩씩하게 노래까지 부르며 잘 걸어 돌아왔다. 많이 걸으니 밥도 잘 먹었고, 잠도 잘 자고, 하루 종일 뛰어놀고 바닷물에 들어가 놀다 와서 인지, 환절기마다 속 썩이던 온몸의 건조증도 말끔히 사라졌다.
애 둘 낳고 체중도 늘고 예민해지고 체력적으로 바닥을 찍었던 나 또한 건강이 제주도에서 얻은 큰 수확 중 하나였다. 매일 수없이 골목길을 걷고 모래밭에서 뛰어놀고 바다에 들어가 수영하다 보니, 일상에서 조금씩 덜 힘들어진 몸 상태를 느낄 수 있었다. 한참을 걸으며 이야기하다 보면 올레길을 알려주는 말 모양 마크들이 보였다. 우리도 모르게 올레길을 걷다, 또 우리도 모르게 올레길을 빠져나와 걷고 차를 가지고 다니면서도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소리와 바다 냄새를 맡기 위해 일부러 많이 걷고 또 걸었다. 저녁만 되면 애들 책 읽어 주는 일도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어 간신히 해 낼 만큼 하루하루가 벅찼었는데, 날이 갈수록 저녁이 되어도 어? 아직 에너지가 좀 남은 느낌인데? 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 기분이 참 괜찮았다. 하루 하루 떠밀려 한 걸음씩 질질 끌려 내딛는 듯했는데, 몸에 힘이 붙고 나니 내가 내 하루를 앞에서 끌고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몸이 약해 배려 받음에 익숙해졌고, 뭔가 의욕적으로 하기엔 몸이 지쳐 포기하는 이유가 오로지 정신력이 약해서 인 줄 알았다. 육지에서는 동네 산책을 제외하고는 어디를 가나 아이 둘을 카시트에 태워 대부분 차로 이동했고, 한참 미세먼지가 온 나라를 뒤덮기 시작하던 때라 야외보다는 실내에서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제주도도 미세먼지를 피해 갈 순 없었다. 하지만 바닷바람에 먼지도 쉽게 쓸려 나가는지 눈에 띄게 탁한 하늘을 보는 날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육지로 돌아와 걷기 생활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모든 게 황홀한 꿈을 꾸고 일상으로 내 몸이 훌쩍 돌아온 느낌이었다. 다시 육지로 돌아와 몸도 환경도 편안한 생활이 되었지만, 아이들이 학교 가고, 신랑도 돌아오면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꿈을 꾸며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쉽다기 보단, 쉽게 누릴 수 없는 귀한 시간들이 나와 내 아이 인생 어딘가에 자리 잡아 추억으로 남아 주었다는 게 아직도 가슴이 벅차다. 아이들도 아마 그 세세한 기억들은 잊을 지라도, 어린 시절에 자연과 함께한 기억들이 살면서 문득문득 감성으로 살아나겠지.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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